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서고트 왕국,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택하다 ==== [[파일: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레카레드 1세.jpg]] 586년 4월 21일, 리우비길드 왕이 사망했다.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귀환하던 '''[[레카레드 1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수의 신민이 신봉하는 가톨릭을 박해하고 소수의 고트 귀족만이 믿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587년 2월 또는 3월에 정식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으며, 그해 4월 툴레도에서 가톨릭을 따르는 성 마리아 교회를 축성했다. 이후 아버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전부 돌려주고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형의 명예를 신원하고 형을 죽인 시세베르트를 체포해 처형했다.[* 비클라르의 요한에 따르면, 헤르메네길드가 코르도바의 교회로 피신했을 때 레카레드 1세가 아버지에게 귀순하면 목숨만은 보장받을 수 있다며 설득했고, 이를 믿은 헤르메네길드가 귀순했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형의 신원을 회복하고 살인자를 처벌한 것은 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589년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비세우, 투야, 루고, 포르투, 팔렌시아, 토르토사 등 각 도시의 주교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엔 48명의 아리우스파 주교와 8명의 전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가톨릭 주교와 전 아리우스파 주교가 각각 한 명씩 별도의 교구를 임시로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노예를 두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 여성 사이에서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첩실에게서 낳은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도록 규정하는 등 전례와 교회법에 관한 일련의 법률이 반포되었다. 비클라르의 요한은 그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정죄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한 [[마르키아누스]]와 동등한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툴레도 공의회 이후 각지에서 지역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파 인사가 가톨릭을 개종하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가 결정되었다. 592년에 열린 세비야 공의회에서는 전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사제로서 직위를 유지하고 옛 아리우스파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 개조하는 조건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르본 공의회에서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주교로 세워질 수 없다는 법령을 체택했다. 아리우스식 예배는 고트식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아리우스파가 공식적으로 사멸되면서 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히스파니아-로마인의 언어로 전환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정책은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많은 고트인들은 아리우스파를 국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여러 귀족은 가톨릭이 국교로 확정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8년, 메리다 백작 [[세가(서고트 왕국)|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가 음모자들을 모아 루시타니아 봉기를 꾀했다. 그들은 리우비길드 치세 때 망명했다가 리우비길드가 사망한 뒤 메리다 주교로 복귀한 가톨릭 주교를 살해하고 세가를 왕으로 세워 중앙 정부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수나는 망명했으며 세가는 두 손을 잃고 갈리시아로 추방되었다. 더 큰 위협은 리우비길드의 전 왕비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고이빈타가 지원한 음모였다. 고이빈타는 툴레도에서 반 가톨릭 음모의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아리우스 주교 울디다와 함께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망했는데, 비클라르의 요한은 "목숨을 멈췄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이로 볼 때 그녀는 자연사한 게 아니라 모종의 방식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울디다는 추방되었고,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은 모조리 처벌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다. 킬데베르트 2세는 그의 형수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또다른 프랑크 왕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587년,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가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589년, 군트람의 또다른 부하 보손이 이끄는 대군[* 서고트 측 기록에 따르면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이 셉티마니아를 침공해 카르카손에 접근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다고 한다.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일찍이 리우비길드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코멘티올로스 장군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코멘티올로스는 먼저 동로마 제국의 이베리아 영토 중심지인 카르타헤나 성벽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문을 건설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남부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레카레드는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한편,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에 굴복했던 [[바스크]]인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회복한 후 이웃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레카레드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평원으로 내려온 적을 격퇴했을 뿐 고산 지대로 숨은 적을 결정적을오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바스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빅토리아를 기점으로 장벽을 세우게 했다. 레카레드는 클라우디우스 등 이베리아-로마 귀족들을 중용했고, 고트인과 로마인에 대해 통일된 법적 절차가 확립된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고트족과 이베리아-로마인은 동일한 법원에서 동일한 법규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식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채택했는데, 이후 역대 서고트 국왕들은 플라비우스를 항상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590년, [[아르기문드]] 공작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꾀헀다. 그는 왕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신하였기에, 기회가 오면 단검으로 레카레드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툴레도로 끌려갔다. 그 후 오른팔이 잘리고 당나귀에 앉은 채 툴레도 광장을 돌며 민중의 비웃음을 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